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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한복판에 숨겨진 비밀의 정원, 창덕궁 후원은 자연과 역사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었다. 궁궐 안에서도 특별히 허락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던 그곳은 왕의 쉼터이자 사색의 장소였다. 이 글은 창덕궁 후원을 탐방하며 만난 여섯 가지 감각적 순간을 담았다. 숲길을 따라 걷는 발자국, 연못에 비친 풍경, 정자에 앉아 느낀 고요함, 계절의 색채, 바람에 실린 향기, 그리고 그 시간이 남긴 여운. 후원은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마음을 다독이는 여행이었다.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후원의 입구에 서자 마음이 설렜다. 마치 허락받은 자만이 들어설 수 있는 비밀의 문 같았다. 그 문을 지나자 번화한 도시의 소음은 사라지고 나무의 속삭임만이 들렸다. 좁은 숲길을 따라 걷자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내려앉았다. 나는 첫 발걸음부터 세상과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후원의 길은 인위적이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굴곡과 돌길, 흙길, 그리고 그 위를 덮은 나뭇가지. 왕이 이 길을 걸었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상상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는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연못에 비친 풍경의 아름다움
후원의 중심에는 연못이 있었다. 연못은 마치 하늘을 품은 거울 같았다. 바람에 일렁이는 수면 위로 나무와 구름, 정자의 그림자가 비쳤다. 나는 연못가에 앉아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작은 물결, 수면 위를 스치는 나뭇잎, 연못 가장자리의 돌과 풀. 그 모든 것이 한 장의 수묵화 같았다. 연못은 고요했지만 살아 있었다. 나는 그 고요함 속에서 마음의 소음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연못에 비친 풍경은 세상의 번잡함을 잠시 접어두게 했다. 그 물빛은 마음 깊숙이 스며드는 치유의 색이었다.
정자에 앉아 느낀 시간의 흐름
연못을 돌아 정자에 올랐다. 나무 기둥과 지붕, 한켠에 걸린 현판이 전통의 멋을 더했다. 정자에 앉으니 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고, 연못 위에 작은 물결을 만들었다. 나는 그 바람을 맞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정자에 앉아 있자니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현대의 빠른 리듬이 아닌, 자연의 느린 리듬 속에 몸을 맡기는 느낌이었다. 정자는 바라보는 공간이자 마음을 비우는 자리였다. 그곳에서 나는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머물렀다. 정자 위의 시간은 고요했고, 그 고요함이 위로였다.
계절의 색채로 물든 후원
후원의 풍경은 계절마다 다른 색을 입는다. 내가 찾은 날은 초록이 가장 짙은 계절이었다. 나뭇잎의 초록, 연못의 푸름, 정자의 나무색, 그리고 햇살의 노란빛. 그 색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색채의 하모니 속에 서 있었다. 계절은 후원의 풍경을 바꾸지만 그 안의 고요함은 변하지 않았다. 가을에는 단풍이, 겨울에는 눈이, 봄에는 꽃이 후원을 장식할 것이다. 나는 오늘 본 초록의 후원이 언젠가 다시 올 때 다른 모습으로 맞아줄 거라 생각했다. 계절의 색은 후원의 시간을 기록하는 붓이었다.
바람에 실려온 향기의 기억
후원을 걷다 보면 문득 향기가 느껴진다. 흙냄새, 나뭇잎 향, 꽃향기, 바람 속에 섞인 풀향기. 그 향기들은 후원을 더 풍성하게 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향기는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추억을 불러오는 힘이었다. 어린 시절 시골집 마당, 여름날 숲길, 비 온 뒤의 정원. 향기는 나를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데려갔다. 후원의 향기는 그렇게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감각을 이어주었다. 나는 그 향기를 마음속에 담았다. 후원의 향기는 언젠가 다시 그곳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탐방이 남긴 여운과 다시 돌아갈 날
후원의 길을 다 돌아 다시 출구에 섰다. 처음 들어올 때와는 다른 마음이었다. 나는 후원의 풍경과 향기, 소리, 색을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그 길은 짧았지만 여운은 길었다. 후원은 단순히 아름다운 정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을 다독이는 공간, 시간을 되돌아보는 공간, 나를 돌아보는 공간이었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마음 한켠에 후원의 고요함을 간직했다. 언젠가 다시 그 비밀의 정원을 찾고 싶다. 다시 그 길을 걷고, 다시 그 연못을 바라보고, 다시 그 정자에 앉고 싶다. 창덕궁 후원은 그렇게 나를 부르는 곳이었다.
창덕궁 후원 탐방은 자연과 전통, 고요함과 사색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숲길과 연못, 정자와 돌담, 바람과 향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풍경을 만들었다. 후원의 시간은 일상의 빠른 리듬을 잠시 멈추게 하고, 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 여운은 오늘도 마음속에 잔잔히 흐른다. 창덕궁 후원은 단순한 궁궐의 정원이 아니라 마음의 정원이자 쉼터였다. 그곳에서 나는 잠시 왕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내 안에 머물 것이다.